겨울 내내 기세등등 했던 동장군도 줄행랑을 친지 오래고
마을 시냇가에 버들강아지가 피는가 했는데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파란 보리 잎이 무성한 숲처럼 자라났습니다.
오전 반나절이 지날쯤 이면 뼈 없는 아지랑이들이 제 세상인양
온 동네 들판을 전세 내어 흐늘거리며 신나게 춤판을 벌이는 봄 날 입니다.
나 살던 고향 집 앞에는 큰 정자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따뜻한 봄날이면 그 정자나무 그늘 밑에 조그만 자리를 펴고
어린 내 또래 사내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소꿉장난을 벌이던 소중한 놀이터가 있었습니다.
시골 농촌마을이 다 그렇듯 나와 내 친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서로 친구사이였고 또한 부모님들도 서로 친구사이였으며
두 살 터울의 형제자매들도 서로 친구 관계로 얽히고설킨 농촌마을,
온 동네 사람들이 한 식구처럼 지내던 농촌마을 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어린 우리들은 아기티 만 벗어나면 이집 저집 함께 몰려 다녔고
어른들이 농사일에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낼 때 우리 꼬맹이들은
정자나무 그늘 밑에서 소꿉장난을 벌이곤 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우량아였던 나는
또래 아이들의 소꿉장난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었고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여자아이들을 한 명씩 짝지어 준 후
나는 동네에서 가장 예쁜 여자아이를 골라 엄마 아빠 놀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였지만 부부놀이가 좀 진했던지
그 여자아이 오빠로부터 꿀밤도 몇 대 맞고 자기 여동생과 놀면 혼난다며
윽박지르고 간 후에도 우리부부는 찰떡부부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듯이
우리들의 엄마 아빠 놀이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어린 시절 얼마 후,
고등학교 형들이 머리에 검은 띠를 질끈 동여매고 하얀 광목 휘장을 두른 채
줄지어 행진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훗날 그것이 4.19 혁명이라 했고
그 후 5.16 혁명이 일어났으며 우리 동네에도 변화의 물결이 밀려왔습니다.
월남으로 파병되는 백마부대와 맹호부대를 찬양하는 노래를 한참이나 따라 불렀고
한동안은 월남전에서 부상 후 귀국한 동네 청년의 무용담과 그들이 가져온
여러 종류의 외제 가전제품이 동네 최고의 화제였습니다.
얼마 후 대대적인 새마을 운동이란 것이 벌어져
벌거벗은 민둥산에 나무를 심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조그만 개울도 복개하여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들었습니다.
한동안은 산아제한운동이 벌어져 어머님들이 보건소에 다니시느라
바쁜 적도 있었으며 새벽이면 어김없이 마을 확성기를 통해
‘잘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새마을 노래가 우렁차게 퍼져 나갔고
그 노래가 한창일 무렵부터 우리 마을의 이집 저집에서
‘서울로 서울로’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그때 ‘서울로 서울로’의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았던 고향 친구들의 재경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립니다.
고향 동창회에 나가면 참으로 좋습니다.
그때 정자나무 밑에서 엄마 아빠 부부놀이를 함께 했던 그 아이들
이미 모두 중년이 되었건만
만나자 마자 몸과 마음은 금새 어릴 적 철부지 아이로 돌아갑니다.
같은 고향에서 자라왔으니 격식도 필요 없습니다.
"임마! 점마!" "이 지지배! 저 지지배!"
"꺄르륵 꺄르륵, 하하 호호" 웃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숨길 것도 가릴 것도 없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온 사이이며 그 집 아궁이는 어떻게 생겼고,
그 집의 숟가락, 젓가락은 몇 개인지?
그리고 그 집의 누런 멍멍이를 언제까지 키우다 언제 잡아먹었는지?
그것 까지도 다 알고 지냈던 사이이니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던 또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던
나 있는 그대로를 다 벗어내어 보여도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저 편안할 따름 입니다.
마치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고향 집을 찾아 간 것처럼......
그런 소중한 고향 추억이 있는 나와는 달리 아내는 고향 친구가 없습니다.
교장선생님을 하셨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 인근의 학교를 이리저리 옮겨 다닌 까닭으로
초등학교 친구가 없고 물론 동창회를 나갈 일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는 초등학교 남녀 동창들이 함께 만나는 것 자체를 이해 못했고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종종 일이 터진다며 동창회에 나가는 나를
경찰서 형사과 수사 반장처럼 의심쩍은 얼굴로 노려보던 아내도
내 고향 친구들의 끈끈한 우정과 고향 정서를 알게 되었고
이제는 나의 고향과 추억, 그리고 친구 모두를 부러워합니다.
어렸을 적 남자 아이들보다 기가 세었던 여자 아이들은 중년이 되어도 여전합니다.
동창회 저녁 식사 때 대화의 주도권을 잡는 것도 주로 여자들이고
2차로 노래방엘 가면 완전히 여인천하가 됩니다.
노래 실력 또한 가수 뺨 칠 정도고 폼 또한 죽여줍니다.
유난히도 우정이 좋다는 우리 동창회의 화제도 골프로 옮겨 간지 꽤나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자치기를 하느라 배고픈 줄도 몰랐고
겨울이면 꽁꽁 언 논바닥 얼음 위에서 팽이치기를 하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젠 가끔 골프를 하기로 약속 했습니다.
처음으로 함께하는 골프이니
동창 ‘지지배’들 앞에서 멋진 샷을 해야 할 텐데
첫 티샷에서 OB가 나면 어쩌지?
되게 신경 쓰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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