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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대차고 다니는 사나이

장보고투 2008. 7. 9. 11:35

과거 직장에서 함께 몸 담았던 OB들과 전지훈련을
하고 있는 태국 MK 로이얄CC의 새벽입니다.
어제 저녁 잠들기 전 핸드폰의 모닝콜과 알람시계에
새벽 5시30분에 기상 벨이 울리도록 해놓곤 잠이 들었습니다.
행여나 제시간에 일어나지 못할까봐 알람시계에
이중으로 안전장치를 해놔서 제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눈을 비비고 기지개 한번 크게 켜고 눈가에 붙은 눈곱딱지를
간단히 떼어내곤 리조트 가까이 식당엘 갑니다.
아직도 캄캄한 새벽이라 식당 앞엔 하얀 전등 빛이 반짝이고
식당 문을 걸어 잠근 채 조리사들의 분주한 모습이 보입니다.

식당 앞에서 서성이는 열성당원 같은 골퍼들이 식당 문 앞에서
스트레칭과 빈 연습스윙에 한창 입니다.
전쟁을 앞둔 장수들의 긴장한 모습처럼, 아니면
중요한 바이어와의 크나큰 상담을 앞둔 상사원의 모습처럼 긴장된 아침입니다.
마치 백화점 세일행사 때 개장 전 문 앞에 줄지어 선 주부들의 모습처럼
식당 문 앞에서 서성이다 문이 열리자마자 잽싸게 식당 안으로 밀려들어 갑니다.

아침은 토스트와 커피 그리고 계란 후라이로 된 간단한 양식이 있고
다른 한편엔 한식이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늘 결전을 치르려면 무엇보다도 배가 든든해야 하니
양식도 먹고 한식도 먹고 커피 한잔 서둘러 마시지만
첫 티샷을 하려면 논산훈련소에서 식사하듯 서둘러야 합니다.

그렇게 서둘러 티그라운드로 나갔지만 우리보다 더 부지런한
두 팀이 티그라운드에서 몸 풀기에 한창입니다.
너무나 이른 아침이라 페어웨이 바닥에 자욱이 깔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다 그냥 나가버립니다.

나 역시 정성스레 스트레칭을 한 후 가라스윙도 반복하고
퍼팅 연습장에서 볼도 몇 개 굴려 봅니다.
오늘 함께 할 동반자들은 다 나와서 미리 몸 풀고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정작 그 사람이 나오질 않고 있습니다.

그 사람 말입니다.
우리가 속칭 `빨대 찬 사나이'라 부르는 그 사람 말입니다.
우리 팀의 티샷 할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도
아직도 그 사람의 모습이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앞 팀의 맨 마지막 골퍼가 샷을 하고 걸어 나갈  
그때 쯤 그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사람의 모습을 보니 바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그는 가라스윙이고 스트레칭이고 할 생각이 없습니다.
느긋한 모습이 천부적인 골퍼 자질을 갖고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는 그저 오늘 내기 골프에서 몇 타를 받고 라운딩을  
할 것인가에 큰 관심을 보일뿐 입니다.

‘가라스윙’ 수십 번에 충분히 스트레칭을 한 동반자들의 첫 티샷은 좌회전 우회전이고
나의 첫 티샷은 거리는 충분히 고속질주 했지만 질기고 질긴 러프 속으로 처박힙니다.
첫 티샷이 그 모양이니 새벽부터 몸 풀고 수십 번이나
가라스윙을 반복한 나의 노력이 아깝습니다.
그 빨대 찬 사나이는 우리를 비웃듯 단 한 번의 가라스윙 끝에
저탄도의 정확한 직구를 날리고 느긋하게 걸어 나갑니다.

우리 모두는 합창단원 모양 `굿샷! 굿샷! 베리굿샷!` 이라며  
비싼 영어로 축하의 말을 외쳤지만 마음은 영 편치 않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를 했는지 아니면 마음과 다른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어제의 재판이 되려는지...

그러다 보니 그는 자연스레 동반자들에게 공동의 적이 되었습니다.
적을 많이 만드는 것은 세상 사는데 좋을 게 없다는 이치를 무시한 채
벌써 여러 날 우리들의 주머니를 털어내고 빨아들입니다.
아마도 "쪽쪽 빨렸다"는 것이 맞는 말 일겁니다.

불과 몇 홀 만에 그로부터 받은 선수금은 다 나가버리고
이제부터 원전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 빨대 찬 사나이를 당할 수 없습니다.
매 홀마다 신기에 가까운 샷이 반복됩니다.
정확한 직구의 티샷, 세컨드 샷으로 온 그린,
그리고 나서 원 퍼트 아니면 투 퍼트
실수를 해야 보기를 잡으니 이거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 며칠째 계속됐고 그러다보니
우리끼리 담합을 하자고 약속한 적도 없었는데도  
어느새 그는 동반자 모두에게 공동의 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샷을 하고 나면 어김없이 구찌겐세이가 시작됩니다.
"한쪽 주머니의 돈 무게 때문에 스탠스의 균형이 무너지겠다."
"금고도 없는데 그동안 딴 돈은 어디에 어떻게 보관 하느냐.“
“와이프 진주 목걸이 한 세트는 사 갈 수 있겠다.” 등등

문제는 우리 모두 그 사람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작년까지 스코어도 비슷했던 것 같아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실력이 일취월장 했다는 것입니다.
손바닥을 만져보니 여기저기 굳은살이 깊이 박힌 것이
시골 농사 집의 머슴 손바닥보다도 더 단단합니다.  

하지만 그는 골프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구찌겐세이에 더 강했습니다.
그는 공동의 적들로부터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하고도 끄덕 없습니다.
며칠째 기른 덥수룩한 검은 수염과 땡볕에 잘 그을린 구릿빛 얼굴에서
마치 TV 드라마 대조영의 흑수돌 장군을 연상하듯 위풍당당 합니다.

그의 원맨쇼는 계속되고 그와 반비례하여 동반자들의 샷은 더더욱 처참해 집니다.
우리의 샷은 당나라 졸개들이 쓰는 칼솜씨에 지나지 않습니다.
‘흑수돌 장군’의 한칼에 수십 명의 당나라 졸개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지듯 꼭 그런 형국입니다.
질기고 질긴 긴 러프에서 허우적 허우적 거리고  
정성들여 샷을 했건만 생크가 나고  페어웨이 우드 샷이 토핑이 되고
겨우 온 그린을 시켰지만 퍼팅도 당나라 졸개들의 수준입니다.

그렇게 쪽쪽 빨리기를 여러 날, 동반자들의 인내도 드러났습니다.
가뭄에 저수지 바닥이 드러나듯이...
마침내 우리는 IMF때나 쓸 수 있는 모라트리움을 선언해 버렸습니다.
즉, 내기골프가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 며칠 동안 저녁이면 저녁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날 골프를 즐기며 싹쓸이 한 판돈을 세느라 침이 다 말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라운딩을 통해 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빨아 들이는 방법도 가랑비에 옷이 젖어 들어가듯 조금씩 요령껏 빨아야지
빨대를 들이대고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그것도 바닥이 훤히 보이도록 쪽쪽 빨아 버린다면
손님이 다 떨어진다는 사실 입니다.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간단합니다.
한곳에 힘이 지나치게 쏠리면 틀림없이 공동의 적이 생겨나고
나 혼자 다 먹으려 하면 영락없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멀어집니다.
인생살이든 사업이든 나에게로 힘이 집중될 땐 그 힘을 적당히 분산시키고
사업도 나 혼자만의 이익보다는 서로 서로에게 이익을 나눌 때
나의 주변에 아군도 많아지고 공생하며 롱런하게 되는 것 이지요.

열흘 동안 36홀씩 하루도 빠짐없이 360홀을 돌고도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고
동반자 모두 공항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지만   
빨대를 차고 다니는 그 사나이,
그 사나이 혼자만 개인택시를 불러 타고 집으로 갔습니다.
쓰리 당할까 겁이 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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